은근한 바람결에 마음의 무장이 풀렸고, 그 간 무거웠을 결연의 뜻을 굽히자마자,
속살의 물렁함을 내보인 것에 대한 후회의 시간이 찾아왔다.
그런날에는 어김없이 스스로를, 주변 사람들을, 정신없이 할퀴다 비난의 촉을 맞고야 멈추곤 한다.
한동안 햇살이 쨍 하던 어느 날-
사무실 슬리퍼가 낡아 여기저기 삐죽한 것들이 터져나왔다.
하루의 시작을 불평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던 나는, 그저 위시리스트에 '슬리퍼' 라고 적는 것으로 쓸데없는 화를 달랬다. 커피 콜라 커피 콜라 를 서너번쯤 반복했을 무렵 거슬리던 슬리퍼 안에서 세번째 발가락이 스타킹을 박차고 달려나온 것을 발견했다.
순간,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? 이 장면을 너에게 꼭 보여주고 싶다...고.
그렇게 하면 네게로 달려가던 심장이 뜀박질을 멈출지도 모른다고.
그러면 나는 다시 속물의 세계에서 괴리감 없이 깔깔- 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.
마치 심인성 강박의 증상처럼 불안했고 집착했다.
그러나 과연 창피를 무릅써 피해야 할 이유는 또 무언가..피식- 웃음이 난다.
쨍 하던 햇살 사라진 어느 날-
퇴근 후 불꺼진 사각의 방에 들어와 잠시 귀퉁이에 꽂혀 앉아 있었다.
쓴 입과 얼얼한 발바닥과 뻐근한 목덜미가 어처구니 없이 눈물샘을 자극했다.
노크소리- 문이 열렸고 불이 켜진다. 아버지다.
순간, 어둠속에 앉아 있던 딸의 모습에 짐짓 놀라신다.
재빨리 방문을 되닫으며 문 뒤로 '...김치전 해줄까?' 하신다.
내 아버지의 김치부침개는 단연 최고다.
'진짜? 좋아 좋아~~해줘 해줘' 호들갑을 떨며 마저 문을 닫는다.
빨래바구니 언저리에 구멍난 스타킹이 데롱데롱 메달려 있었다.
햇살 사라진 어느 비요일-
빛나는 햇살보다 어둠의 무게에 더 익숙한 나는, 가라앉는 것들의 절도있음을 좋아한다.
그런날엔 보는 것도, 듣는 것도, 집중이 쉽고 몰입이 길다.
오랜만에 정돈된 기분으로 늦도록 일에 매달려 있다.
마음은 하루만큼 멀어지고 또 하루가 지나면 그만큼 더 멀리갈 수 있을 것이다.
문자 메세지 알림음이 딩동- 울린다.
.
.
'....사랑한다. 우리 딸'